넷플릭스 새로운 콘텐츠를 탐색하다가 반딧불이의 묘가 보였다.
제목은 참 많이 들어봤는데 안 본 것 같아 관심이 갔다.
보고 싶은 느낌이 확 왔고 이때다 싶어 재생을 눌렀다.
결론적으로는 괜히 보았다.
너무 슬퍼서 마음속으로 이건 실화가 아니야라고 돼 내었다.
(물론 비슷한 경우가 많이 있었을 것 같다)
배경은 2차 대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다.
주인공은 세이타(오빠), 세츠코(여동생)이며
남매의 아버지는 해군장교로 전쟁에 참전 중이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오길 기다리며 평범함 삶을
살던 이 가족은 어느 날 어머니가 은행에 갔을 때
미군 폭격기에 공습에 집이 불타버리게 되고
남매는 다행히 화를 피하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못해
전신에 화상을 입어 임시로 운영 중인 초등학교 병동에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며 다른 시체 더미와 함께 화장된다.
아들 세이타는 이를 보았으나 아직 어린 여동생 세츠코에게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차마 하지 못한다.
집이 불타버린 남매는 결국 먼 친척 아주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얹혀살게 된다. 그렇지만 친척아주머니는 전쟁시기에
학교에 가지도 소방활동도 하지 않으며 놀기만 하는
남매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전쟁시기이다 보니 보급받는
쌀도 양이 적어 아주머니는 남매 어머니의 기모노를 팔아
쌀을 얻자고 설득하고 이로 인해 받은 쌀을 자매와 반으로 나눈다.
기모노로 바꾼 쌀을 다 소진하고 아주머니의 딸과
남편은 쌀밥을 먹지만 남매에게는 죽을 주는 아주머니를 보며
자신들을 냉대한다고 느끼고 화로를 구해 따로 쌀을 지어먹는다.
아주머니는 이를 괘씸히 여기고 이들을 더 꾸짖는다.
결국 남매는 참지 못하고 미사일 폭격 때 피신했던 굴둑에 자신들의 터전을
만든다. 처음에는 둘만 있는 것이 신이 났었다. 굴둑이 어둡자 반딧불이를
잡아 빛으로 (반딧불이는 밤에 예쁘게 빛나다 아침에는 빛을 잃고 죽어있었다.)
사용하고 화로를 통해 밥을 지어먹는 것이 낭만적으로 보였지만
이는 얼마가지 못했다. 금세 식량은 떨어졌고 몸은 병들기 시작했다.
특히 세츠코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고 바짝 말라가기 시작했다.
보건소의사에게 갔지만 전쟁통에 의사는 정신없이 바빴고
무미건조하게 영양실조라고 진단을 내리고 먹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세이타는 약이라도 줄 수 없냐고 묻지만 의사는 바쁘다며
냉정하게 다음 환자를 받아야 된다며 이들을 쫓아낸다.
의사의 냉소적인 태도에 세이타는 화를 내며 날뛰지만 간호사에게 저지
당하며 결국 쫓겨난다. 계속 아파하는 세츠코를 보며 결국 세이타는
과일서리를 하게 되고 몇 번이고 이를 반복하다 밭주인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다. 너무 슬펐던 건 동생이 보는 앞에서 하대 당하고 사정없이
맞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밭주인은 경찰서에 세이타를 끌고 가
도둑이라며 처벌해 달라고 하지만 마음이 나쁘지 않았던 경찰은
세이타도 잘못이지만 밭주인이 때린 것도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밭주인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세이타도 풀려나게 된다.
오빠걱정에 경찰서까지 혼자 와서 기다리던 세츠코는 퉁퉁 부은
오빠에 얼굴을 보고 울고 세이타도 동생이 우는 모습에
서러움이 복받쳐 처음으로 동생에게 펑펑 우는 모습을 보인다.
야속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세츠코의 몸상태는 점점 더 악화 됐고
세이타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전투기가 마을 폭격하는 틈을 타
마을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피신할 때 세이타는 반대로 기뻐하며
마을로 들어가 빈집을 털기 시작한다.
빈집에서 이불과 먹을 것을 잔뜩 가져와 세츠코에게 먹이려고 하지만
세츠코는 먹을 힘도 남아있지 않다. 의식이 온전치 않아 입에 머금고 있던 단추를
빼내어 수박을 입에 넣어주지만. 세츠코는 다 삼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엄마에 이어 세이타는 동생마저 자기 손으로 화장을 한다.
화장재는 평소 세이타가 좋아하던 사탕통에 넣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참전한 아버지 또한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을 한 번에 셋이나 떠나보냈으니 세이타 또한 온전할 리 없다.
세이타 또한 노숙을 하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아사한다.
세이타와 세츠코는 영혼으로 만나 열차를 타고 자신들의 추억을 돌아보다가
시간이 흘러 현대화된 일본의 도심을 보여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어머니나 세츠코가 죽을 때도
극적인 음악이나 설정을 넣지도 않았다. 신파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없어서 좋았다.
그러나 보고 난 뒤에 쉽게 여운이 가시지 않았고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우선 세츠코가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졌고 그로 인해 왜 친척아주머니에게서
떠나는 선택을 했으며 다시 돌아가지 않았나 하는 속상함이 생겼다.
내가 느끼기엔 친척 아주머니가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본인의 사정도 역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먼 친척들을 받아주었다. 남매 어머니의 기모노를 팔았을 때도
쌀을 정확히 절반을 나누어 주었고 자신의 남편과 딸에게는 쌀밥을 주고
남매는 죽을 먹였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여 본인 또한 죽을 먹을 만큼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남매는 본인들이 차별을 당한다 생각해
화로를 구해 남의 집에 있으며 도움을 받고 있음에도
본인들만 배를 채웠다. 물론 어리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도 이해된다.
하지만 세츠코의 몸상태가 심각해졌을 때는 돌아왔어야 됐다.
용서를 구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며 버티려 한 것은 아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생각하며 작가는 일본이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아집을 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일찍 용서를 구하고
항복을 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제목인 반딧불이의 묘 또한 남매가 굴둑밑에서 지낼 때 불빛으로 사용하던
반딧불이가 밤에는 찬란히 빛을 내다가 굳이 아침에 죽어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보면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의 허망함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네이버 감상평에는 피해자코스프레 영화로 보는 감상평의 대부분이었다.
물론 작가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결론을 강요하는 게 작품의 취지가 아니니까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겠지만 이런 걸 볼 때마다 깊은 생각에 빠진다.
과연 일본의 후손들은 한국이나 다른 피해국가에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국가의 입장이나 직접적으로
침략의 발단을 만든 사람들이 욕을 먹어야 하고 보상을 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작품 내용대로 본다면 어린이들은 전쟁의 의지가 있던
사람들도 아니고 이들마져 슬픈 비극으로 끝나는데
저게 피해자 코스프레인가.
그걸 넘어서 보여주는 의도 자체가 일본을 찬양하지도 않고
과오를 합리화 하는 모습이 없는데 비극을 이야기하는게 염치
없는 행동일까?
가해국가의 후손이나 국민들은 어떤 의도이든
저 시기에 대해 다룰 자격이 없는걸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무슨 일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건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쳐 자신은 무조건 맞고 남은
틀리다며 행동하는 사람이 제일 나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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